사바주에서 돼지고기가 어떻게 유통되는지, 그리고 왜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에서 특별하게 돼지고기 접근성이 높은 지를 살펴봅니다.
1. 돼지고기의 판매: '논할랄 바비'(Non-Halal Babi) 구역의 분리 시스템
사바주의 모든 대형 마트와 전통시장은 '논할랄(non-halal)' 존을 따로 운영합니다. 이곳에서는 돼지고기(babi) 뿐 아니라 알코올 제품과 비할랄 재료들이 함께 판매됩니다.
이 구역은 명확히 문으로 구분되며, 무슬림 고객은 출입을 피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Batara 같은 로컬 마트에서도 논할랄 구역은 문으로 구분되어 운영됩니다. 수리아사바나 이마고몰 내 슈퍼마켓에서도 '논할랄' 공간은 별도로 운영되고, 직원 역시 비무슬림으로 구성됩니다. 아래 사진은 코타키나발루 시내에 위치한 전문 돼지고기 소매점 'Q Pork'의 외관입니다. 이러한 상점은 비무슬림 고객을 위해 별도로 운영되며, 고급 신선육을 안정적으로 공급합니다.
중국계 상점, 필리핀 시장, 기독교계 원주민이 운영하는 소형 식료품점에서도 돼지고기는 흔히 판매됩니다. 이 구조 덕분에 이슬람률이 높은 말레이시아 내에서도 사바주는 돼지고기의 접근성이 높은 지역으로 평가됩니다.
2. 유통 구조: 당일 도축, 당일 판매
코타키나발루의 돼지고기 유통은 '슬로터 투 셀(slaughter-to-sell)' 시스템, 즉 도축장에서 시장까지 매우 짧은 시간 내에 이동하는 구조입니다.
새벽 4시경에 도축된 돼지고기는 아침 7시~10시 사이에 시장에서 판매되고 대부분 당일 소진됩니다. 이 구조는 냉동 유통보다 신선도 유지에 유리하며, 소비자 입장에서는 냉장육보다도 '더 맛있다'라고 느낄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아래 사진은 코타키나발루의 돼지고기 전문점 내부 진열 모습으로, 고기 분할도와 함께 깔끔한 유통 환경을 보여줍니다.
특히 동공원시장(Donggongon Market)처럼 규모가 크고 회전율이 빠른 재래시장에서는 냉장 시스템 없이도 위생 기준을 유지하며 빠른 유통이 가능합니다.
한국과 달리, 냉동보관보다 '빠른 회전과 조기 소비'가 돼지고기 유통의 핵심 원칙입니다. 코타키나발루의 돼지고기값은 특이하게도 냉동은 한국 대비 약 80% 수준이며, 당일 도축된 냉장 신선육은 오히려 절반 가격에 구입할 수 있어 신선육이 더 저렴한 구조입니다. [코타키나발루 소고기, 왜 이렇게 저렴할까?]라는 글에서도 유사한 가격 구조가 설명됩니다.
3. 기후와 사료: 지방이 적은 돼지고기의 이유
FAQ
Q. 코타키나발루의 돼지고기는 왜 지방이 적은가요? A. 열대 고온다습한 기후와 지방 축적에 불리한 야자박(Palm Kernel Meal) 사료 사용이 주요 원인입니다. 돼지는 체온 조절을 위해 지방을 덜 축적하고, 근육 위주로 성장하게 됩니다.
코타키나발루에서 사육되는 돼지는 일반적으로 한국산보다 기름기가 적은 편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한 품종 차이 때문이 아니라, 기후와 사료에서 비롯됩니다.
코타키나발루는 연중 대부분이 고온다습한 열대 기후에 속합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돼지의 체온 조절이 어려워 지방을 많이 축적하지 않으려는 생리적 반응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돼지는 자연스럽게 살코기 위주로 성장하게 됩니다.
또한, 이 지역에서는 돼지 사료로 야자박(Palm Kernel Meal)이 많이 사용됩니다. 야자박은 팜유를 짜고 남긴 부산물로, 단백질은 포함되어 있지만 필수 아미노산이 부족하고 소화율이 낮아 지방 축적에 불리한 특성이 있습니다. 대신 근육 발달을 유도하며, 결과적으로 비계가 얇고 살코기가 많은 형태로 자라게 됩니다.
이러한 기후와 사료 조건이 결합되면서 코타키나발루 돼지는 지방층이 얇고 단단한 식감을 가지게 됩니다. 한국의 삼겹살처럼 고소한 풍미는 다소 약할 수 있지만, 담백하고 신선한 맛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4. 자급율과 돼지 품종: 사바주의 독립적인 축산 구조
사바주는 말레이시아 내에서도 돼지 자급률이 매우 높은 지역입니다. 2020년 기준 100% 자급률을 달성한 바 있으며, 이후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의 영향으로 일부 수입이 늘었지만, 여전히 다수의 중소규모 돼지 농장을 운영 중입니다.
사바주에서 키우는 대표 품종은 Large White, Landrace, Duroc, Berkshire입니다. 대부분은 Large White × Landrace × Duroc의 3원 교잡 구조로, 성장 속도와 육질을 균형 있게 유지하려는 목적입니다.
야외활동량이 많은 환경과 고온다습한 기후 속에서 자라다 보니, 피하지방이 얇고 근육 비율이 높은 돼지고기가 생산됩니다. 또한, 재래시장에서 유통되는 고기는 대부분 당일 도축되어 냉동 없이 판매되므로,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유통·소비 문화를 형성합니다.
5. 왜 사바주는 돼지고기에 관대할까?
말레이시아는 헌법상 이슬람 국가이지만, 사바주는 종교적 다원성과 문화적 복합성이 보장된 주(State)입니다. 전체 인구 중 약 50% 이상이 **비이슬람(기독교, 불교, 무종교 등)**이며, 카두산두순족(Kadazan-Dusun) 같은 기독교 원주민 커뮤니티가 중심을 이룹니다.
이러한 사회적 기반 덕분에, 사바주는 말레이시아 내에서도 돼지고기 소비와 판매가 법적으로, 문화적으로 자연스럽게 허용된 특수한 지역입니다. 대형 유통망에서도 돼지고기를 적극적으로 다루며, 이슬람률이 높은 다른 주(예: 조호르, 트렝가누)와는 완전히 다른 유통 구조를 갖습니다.
결론 (Conclusion)
코타키나발루에서 돼지고기를 유통하고 소비하는 구조는 단순한 음식문화가 아니라, 종교, 기후, 경제, 유통 시스템이 조화된 결과물입니다. 냉동이 아닌 당일 유통, 고온기후에 적응한 지방 적은 육질, 그리고 사료 구조까지, 이 지역에서의 돼지고기 소비는 다른 어떤 이슬람권에서도 보기 힘든 독특한 시스템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한국인이지만 코타키나발루에서 유통되는 돼지고기가 더 신선하고 맛있다고 느낍니다.